0.N년차 마케터의 상반기 회고록

프로덕트의 끝물, PM의 종말, 밀도의 상대성. 20대 마케터의 시선으로 본 일과 성장, 그리고 포기와 리셋의 철학. ‘잘 되고 싶지만 굳이 똑같이 되고 싶진 않은’ 사람들을 위한 글
0.N년차 마케터의 상반기 회고록

최근에 이상한 글을 봤다

요즘 플랫폼에서 자주 보이는 20대 초반, 스타트업 다닌다는 사람의 인터뷰.

“프로덕트 시대는 갔다. 해자가 없다. 나중엔 엔터나 방산 쪽으로 가고 싶다.”
읽고 어이없다가, 또 좀 이해됐다. 프로덕트라는 말의 끝물이 왔나.
강의도 많이 생기고 있다. 나도 비싼 프로덕트 강의 결제했는데.

요즘은 아이디어도 AI한테 묻고, MVP도 짜달라 하고, 데이터도 정리시킨다.
 

에어비앤비가 PM 없앴다는 뉴스도 봤다

감각 좋은 디자이너가 결정 못 할 이유가 뭐가 있나, 싶고.
문과 직장인이 주말에 따라가기엔 시장이 너무 빨라졌다.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PM을 꿈꿨던 건, 구멍가게처럼 이것저것 다 만져봤기 때문이다.
데이터, 퍼널, 매체, 바이럴, 백엔드, 프런트…
근데 굳이 PM이 아니어도 되겠다.
굳이 “내 서비스”도 아니어도 되겠다.
그냥 “내 것”이면 된다. 뭐라도.

요즘은 오프라인 공간을 돌아다닌다.

츠타야에 취해서 일본 갔던 2019년이 떠오른다.
금요일 밤이나 주말에 몰아서 다닌다.
메모도 열심히 한다.
환경이 사람 만든다는 말, 요즘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힘 빠지는 날엔 돈을 걸어둔다.
비싼 카페, 전시, 예약. 돈이 아까워서라도 나가게 된다.
일정은 캘린더에 다 박는다.
18시 퇴근, 19시 도서관, 20시 필라테스, 21시 헬스, 22시 복귀.
알림이 오면 그제야 몸이 움직인다.
자동 이체, 자동 투자, 자동 저축, 자동 보험. 가능한 건 자동.

“쌓여야 사업이고, 프리랜서는 쌓이지 않는다.” 선배 말이 있었다.
프리랜서는 일의 규모가 한계가 있고,
대행사는 사람 관리가 일이 된다.
둘 다 썩 내키지 않는다.
큰 대행사 임원도 자기 브랜드 하고 싶다더라.
1000억 하던 사람이 나와서 100억 맡는 걸 자랑처럼 말한다.
다들 큰 클라이언트를 좋아한다.
나는 여러 업종이 실제로 어떻게 돈 버는지 그냥 궁금하다.

그래서 다양하게 해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사람과 많이 부딪히는 일은 리스크가 크다

나는 가끔 글로 “저 사람 왜 저럴까” 하고 눌러 쓰는 편이라.
 

그래도 마케팅 자체는 아직 재미있다.
될 것 같다가 안 되고, 안 될 것 같은데 될 때가 있다.
퍼포먼스 정리하면 콘텐츠가 울고,
콘텐츠 다듬으면 퍼포먼스가 토라진다.
검색, CRM, 언드, 시딩, 가끔은 BM이랑 상품구성까지.
한 명이 이걸 만지는 게 축복이자 불안.
압박이 과하지 않고, 동료들과 웃을 수 있다는 건 또 축복.
근데 즐겁다고 말하는 나를 보면—프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패를 시행착오라 부르며 위로하는 재주만 는 것 같아서.

경력과 실력이 쌓이면, 그다음에는 뭘 고민할까

아마 일 자체가 즐거운 게 아니라, 다음 스텝이 궁금한 거겠지.
다니는 헬스장에 제안서를 넣은 것도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하던 방식이 여기서도 통하나?
몇천억 다루는 회사는 “답이 없다”고 하고,
몇백·몇천만 원 다루는 쪽은 “답이 있다”고 한다.
정답이 있나? 있으면 내가 늦게 도달하긴 싫다. 그런 마음.

그러다 보면 나는 마케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직접 해보고 남을 이겨먹고 싶은, 좀 소심한 경쟁러일지도.
“딱 이거면 된다” 같은 사람은 못 된다.
매주 트렌드 발행하는 사람도 못 되고.

시간의 밀도

군대 친구가 그 말을 했다. “나는 웬만한 애들과 사는 시간이 다르다.”
그때는 거만해 보여도, 지금은 조금 알겠다.
같은 빡빡머리에서 시작했는데, 5년 지나니 서로 다른 길.
고등학생 창업자, 대학생 대표—그들도 다른 밀도로 산다.
헬스장 제안서 내고 “괜찮은 직업인”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로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그 친구는 비범을 기다리고, 나는 아직 범부.

상대주의에 오래 눌러 앉아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이유는 있겠지, 나는 나대로 가고 있겠지.
그러다 한 번 깨졌다. 기준을 조금은 세워야 하겠다고.
높게 잡고 못 이루면 무서워서,
가끔은 “이 정도면 괜찮지” 하며 버틴다.
못 이룰 땐 상대주의,
성과 낮을 땐 목표를 더 세게.
이렇게 스위칭하면서 가는 수밖에.

밀도는 상대적이다.
한 번 해내면 유지는 의외로 쉽다.
운동엔 머슬메모리가 있고,
언어는 매일 10분보다 한 달 몰빵이 더 세게 박힐 때가 있다.
일도 그럴지 모른다.
그래서 빡세다는 이 루틴도, 이제는 그냥 산다.
반 년 동안 마케팅/비즈니스 책만 잔뜩 읽었는데, 이 밀도도 익숙해졌다.

새로운 업종의 마케팅을 해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운동으로 대체 중.
초보자 모드가 주는 긴장감이 나를 깨운다.
적성, 거리, 동료, 복지, 문화—그걸로 만족도가 정해진다더니,
지금은 꽤 만족.
시간이 빨리 간다. 어느새 8개월. 1년도 금방이겠지.

루팡하면서도 하루가 안 가던 날들이 있었고,
컨펌만 기다리다 멍해지던 날들도 있었다.
그 온갖 밀도를 건너서,
지금의 적당한 밀도—이걸 즐기는 중이다.

가끔 이렇게 적어두면,
그냥 다음 걸음이 좀 더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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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n년차 마케터 파타과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