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정치학: 부르디외에서 알고리즘까지, ‘좋음’을 둘러싼 권력의 설계도

취향은 개인 취향이 아니다. 구별짓기–자본–장–아비투스로 작동하는 사회적·정치적 메커니즘이며, 하위문화 자본·옴니보어 가설·음식의 문화정치·알고리즘 문화로 확장된다. 누가 ‘좋음’을 정의하고 유통하는가를 해부한다.
취향의 정치학: 부르디외에서 알고리즘까지, ‘좋음’을 둘러싼 권력의 설계도

0) 한 줄 핵심

취향은 개인의 미감이 아니라 권력의 언어다. 누가 ‘쿨/고급/정통’을 규정하고 유통하는가를 둘러싸고 구별짓기–경쟁–배제–포섭이 반복된다. 이 글은 부르디외의 토대를 출발점으로, 하위문화 자본, 옴니보어(다식가) 가설, 맛과 정체성의 문화정치, 플랫폼 알고리즘까지 현재의 취향 체제를 입체적으로 정리한다.


1) 고전적 토대 ―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부르디외의 명제는 간명하다. “취향은 자연성이 아니라 사회성”이다. 사람의 미적 선호는 계급·교육이 만들어낸 문화자본과 몸에 밴 성향인 아비투스로 조직된다. 사람들은 각 문화 장(field)—예술·음악·패션·음식—의 규칙 안에서 자본을 축적·교환하며, 그 결과 형성된 취향으로 자신의 위치를 구별짓기 한다.

  • 자본의 다원성: 경제자본만이 전부가 아니다. 문화·사회·상징자본은 서로 전환 가능하며, 엘리트 교육·교양·인맥·인증의 형태로 축적된다.

  • 아비투스: “자연처럼 느껴지는 사회성”. 가정·학교·동네의 장기 경험이 몸동작, 말투, 취향 선택의 자동조종장치가 된다.

  • ‘필요의 취향’ vs ‘자유의 취향’: 구조적 자원이 부족한 집단은 량·가격·실용을, 여유가 있는 집단은 형식·품질·차별성을 중시한다. 이 대칭은 식생활을 넘어 음악·스포츠·인테리어 전반에 반복된다.

  • 교육의 재생산: 학교는 지배계급의 코드를 ‘보편 기준’으로 표준화해 불평등을 정당화·재생산한다.

핵심 포인트: “내가 그냥 좋아해서”의 뒤에는 장–자본–아비투스라는 구조가 있다.


2) 하위문화의 정치학 ― ‘하위문화 자본’(Sarah Thornton)

권력은 상류 엘리트에게만 있는가? 아니다. 클럽·레이브·스트리트 같은 청년 하위문화에도 위계가 있다. 하위문화 자본은 “진짜” 코드를 아는가로 측정된다—언더그라운드 레이블, 현장성, 올바른 스타일링, 말투, 내부 규칙. 흥미로운 점은 티 내면 깎인다는 역설: 과시가 보이면 이미 “핫”하지 않다.
이 논의는 부르디외의 장 개념을 대중문화 현장에 이식한다. 게이트키핑(입장·복장·플레이리스트·커뮤니티 규칙)이 누가 안/밖에 설지 결정한다. 주류와의 거리두기, 정통성 인증이 곧 권력이다.


3) ‘옴니보어 가설’ ― 구별짓기 이후의 구별짓기

1990년대 이후 상층 소비자는 배타적 ‘하이브로(highbrow)’만 소비하지 않는다. 클래식도, 힙합도, 컨트리도 아우르는 옴니보어(잡식가)가 위신이 되었다. 구별짓기의 컨텐츠가 바뀐 셈이다.
오늘날의 상징자본은 폭·유연성·횡단성이다. “다 아는 사람, 맥락을 읽어 믹스하는 사람”이 칭송받는다. 그러나 이것 역시 또 다른 배제를 낳는다. 누구나 잡식가가 될 수는 없다. 시간·돈·교육·네트워크—결국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4) 음식과 정체성의 문화정치 ― ‘맛’은 어떻게 권력을 매개하나

맛은 혀끝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기억·지역·젠더의 교차점이다. 테루아(원산지), 장인성, 인증(원산지 표기·지리 표시)는 가격·가치를 지배한다. 이민·디아스포라의 음식이 주류화/상품화될 때, 권한과 수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국가·도시 브랜드는 전통을 법/표장으로 봉인해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다. 푸드 네셔널리즘, 문화적 소유권 논쟁이 여기서 발생한다.
한 그릇의 라면, 한 잔의 차, 한 조각의 치즈가 계급적 미감, 지역의 기억, 국가의 상징을 동시에 호출한다. 음식은 가장 일상적인 권력의 언어다.


5) 플랫폼/알고리즘 시대 ― 추천이 ‘감식안’을 어떻게 바꾸는가

오늘의 문지기는 평론가만이 아니다. 플랫폼 알고리즘이 가시성과 수익, 유통의 흐름을 재편한다. 추천·순위·검색 키워드는 문화적 발견 경로를 결정하고, 사용자는 “추천이 내 취향을 반영하나, 규정하나?”라는 알고리즘 불안을 겪는다.
음악 스트리밍에선 인간 큐레이터와 모델 파라미터가 무엇이 ‘좋다’는 판단을 놓고 경합한다. 넷플릭스식 개인화는 접근성을 높였지만, 동시에 동질화·편향·불투명성 논쟁을 낳았다. 심미 권력의 중추가 기관→플랫폼으로 이동하며, 투명성·책임성·공정성이 새로운 정치 의제로 부상한다.


6) 한 장으로 보는 지도

  • 구조: 자본(문화/사회/상징) × 장(field) × 아비투스 → 취향 실천 → 구별짓기/재생산

  • 변형: 하위문화 자본 → 주류 바깥의 인증·배제 장치

  • 전환: 옴니보어 → 폭·잡식성이 새 위신(그러나 또 다른 위계)

  • 확장: 맛/음식–정체성–지역/국가의 문화정치

  • 현재: 알고리즘 문화 → 추천/키워드가 심미 권력을 통치


7) 연구·실무 적용 체크리스트

  1. 장을 규정하라: 다루는 영역(K-푸드, 인디 음악, 스니커즈)을 장으로 정의하고 행위자/규칙/자본을 맵핑.

  2. 자본 흐름을 추적: 학력·평론·페스티벌 라인업·플랫폼 배지 등 문화/사회/상징자본의 취득·인증 경로 기록.

  3. 구별짓기 장치 수집: 드레스코드, 입문자 혐오, 한정판 추첨, 알고리즘 추천 슬롯 등 게이트 목록화.

  4. 옴니보어 지표 설계: 상층 인플루언서의 레퍼토리 폭, 장르 교차 빈도, 협업 네트워크 중심성 측정.

  5. 알고리즘 영향 분석: 추천/순위가 발견–가시성–수익에 미치는 효과를 인터페이스·데이터로 검증.

  6. 음식/정체성 사례화: 원산지·테루아·장인성 담론이 가치사슬을 어떻게 재편하는지 사례 스토리텔링.


8) 실천을 위한 요약 인사이트

  • 브랜드/문화 기획: “우리 타깃의 취향”을 묻기 전에, 그들이 속한 장의 규칙인증 장치를 먼저 해부하라.

  • 콘텐츠 전략: 엘리트주의 vs 포용의 이분법을 넘어, 옴니보어형 큐레이션으로 맥락의 폭을 자본화하라.

  • 플랫폼 대응: 알고리즘을 ‘주어진 자연’이 아니라 정치적 인프라로 보라—가시성·책임의 기준을 설계하라.

  • 푸드/로컬 비즈니스: ‘정통’ 표지를 어떻게 만들고, 누구와 수익을 분배할 것인지 거버넌스부터 설계하라.


9) 토론 질문

  • 옴니보어는 평등화의 증거인가, 더 정교한 엘리트주의인가? 어느 지표로 판별할 수 있을까?

  • 알고리즘 추천은 취향의 민주화인가, 새 문지기화인가? 가시성·수익·담론 지표로 비교 실험을 어떻게 설계할까?

  • 한 지역 음식의 정통성은 누가 정의하고 누가 이익을 가져가는가? 레퍼토리(요리법) vs 레지스트리(법/표장)의 충돌을 사례로 논증하라.


결론

취향은 정치의 기술이다. “나는 그냥 이게 좋아”라는 말 뒤에는 언제나 장–자본–아비투스–알고리즘이 있다. 이 구조를 읽을 때, 우리는 타인의 취향을 비난하는 대신 작동 원리를 설명할 수 있고, 배제의 장치를 포용의 설계로 치환할 수 있다. 좋음의 정치를 이해하는 일이 곧 더 공정한 문화 인프라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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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n년차 마케터 파타과니아